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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추억은 힘이 된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9월이 되면 내 추억의 창고에서 먼지를 털고 어제 일인 듯 걸어 나오는 잊지 못할 이야기가 있다.   나이 서른에 터스틴 시에 위치한 아파트 매니저를 하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었다.     저녁 식사가 끝나면 나는 한 살이 안 된 막내를 유모차에 태우고 3살, 5살 된 아이들을 데리고 몬티고 아파트 앞을 지나 산책을 하곤 했다. 그때마다 아파트 매니저 멜라니는 잔디에 물을 주고 있었다. 그 집 아들과 우리 아들은 같은 유아원을 다니기에 멜라니와 나는 쉽게 친해졌다. 가끔 마켓도 같이 다녔다.     멜라니가 산책하는 나를 반갑게 불렀다. 부부가 오하이오에 계신 부모 곁으로 이사를 하기로 결정해서 아파트 매니저를 그만두려고 하는데 나를 추천하고 싶다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당황스러웠지만, 남편과 의논해 보겠다고 약속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회사에 다니고 있지만 우리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 생각하고 매니저 일을 맡기로 했다.       몬티고 아파트는 루미스 자산관리(Loomis Property) 회사가 관리하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인터뷰와 전과 조회를 마치고 2주 만에 정식 직원이 되었다.   26유닛을 관리하는 매니저의 특권은 아파트 앞쪽 3 베드룸 독채를 무료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나의 임무는 입주자 인터뷰와 월세를 받아 관리사무소에 전달하는 일이었다. 남편은 건물 관리를 맡았다. 잔디 깎기나 페인트, 모든 수리는 관리사무실에 연락하면 회사에서 직접 하기 때문에 어려운 일 없이 2년간 매니저 일을 했다.     어느 날 아파트에서 타파웨어 파티가 열렸다. 호스트는 13호에 사는 제니였다. 제니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솜씨로 물건을 많이 팔았다. 나도 그날 파 넣는 플라스틱 통을 샀다.     그 일로 제니와 나는 가까워졌고 제니의 남편이 사진작가라는 것도 알게 됐다.     제니와 딸은 백인이고 남편은 흑인이었다. 제니 남편은 맘씨 좋은 신사였다. 출장을 다니는 일 외엔 가정적으로 보였다.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고 친절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가 나와 막내딸을 모델로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몇 번 거절하다 결국 승낙하였다. 그때 찍은 사진은 오렌지 몰에 전시돼 상을 받았다. 제목은 ‘엄마와 딸’이었다. 지나고 보니 소중한 추억의 사진이 되었다.   얼마 전 터스틴 시에 갈 일이 있어 옛날 그 아파트를 가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44년이 지났지만, 기억이 또렷했다. 내 평생 첫 직장이었고 애정을 쏟아 일했던 곳이다. 입주자들을 관리할 때의 많은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무 담 너머로 살짝 아파트를 들여다보았다. 우리가 살던 그 방에 지금은 누가 살고 있을까 궁금했지만, 집 주위는 고요하고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입주자들이 이사 갈 때 버리고 가는 선인장이나 화초를 화분에 옮겨 올려놓던 벤치는 사라지고 없었다.     비 오는 날 거실의 벽난로 앞에서 남편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던 날들. 굴뚝을 타고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선물을 가져온다고 믿고 있던 어린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면 정말 로맨틱했다.   오늘은 유난히 흑인 사진작가 부부가 생각난다. 그 부부는 얼마나 늙었을까. 아니 얼마나 잘 익어가고 있을까. 백인 아내는 부모님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던데 지금까지 행복하게 잘살고 있을까. 때로는 부부싸움을 하고 나와 울고 서 있던 제니. 그들 부부가 안고 있던 슬픔이 지금쯤 다 지나갔는지….   그 집의 애교쟁이 딸 캐롤라인도 보고 싶다. 인간사 새옹지마. 44년 전 직장이었던 몬티고 아파트 앞에서 기도했다. 부디 어려움이 있었더라도 잘 극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기를.     인생은 배낭을 메고 떠나는 여행 같은 것. 배낭이 가벼울수록 발걸음이 가볍다. 버려도 되는 것은 미련 없이 버리고 걸어가자. 다만 추억은 몇 짐을 가득 메도 힘이 된다. 엄영아 / 수필가수필 추억 배낭 아파트 매니저 아파트 앞쪽 제니 남편

2021-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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